며칠째 꿈자리가 사나웠다.
무엇인가 해야 하는 데 꿈 속에서 몸이 한없이 피곤해서 아무것도 못하는 꿈, 시험을 봐야 하는 데 시험지와 답안지가 없는 꿈, 무엇인가 답답한 꿈… 마치 답답한 나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가볍게 무시하기로 했다. 대신 지난 한 주간 내게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며 몇 가지를 떠올렸다. 그 몇 가지는 아내에 대한 감사함, 오선화 작가가 들려준 이야기, 성경 이야기 하나와 성경 구절 하나다. 



내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아내는 한결 같이 내편이 되어주었다. 어쩌면 아내는 항상 내편이었는데, 그것을 한국에 들어와서 느낀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지금 아내는 내편이다. 나는 그것에 대한 감사한다. 내 감정이 요동치고 있을 때나 우울할 때, 아내는 인내심을 가지고 내편이 되어주었다. 
아내가 내편이 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아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예전에 Union Presbyterian Seminary 어드미션 담당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사랑에 대한 정의를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했는데, 이 사랑의 정의를 아내를 통해 오랜 시간동안 아주 강하게 경험한 것이다.  
이 사랑의 경험은 매우 강력하다. 1년여 가까이 바닥을 향해가고 있던 나의 에너지의 방향을 바꿔 놓았다. 그 증거로 며칠째 이어지는 사나운 꿈자리가 나의 전반적인 감정을 지배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내에 대한 감사함을 떠올리게 하지 않았는가? 아내의 사랑은 나의 에너지를 변화시켰다. 



오선화 작가가 떠오르게 된 것은 이 글을 끄적이면서 갑자기 떠오르게 된 ‘누군가의 편이 되어 준다는 것’에 대한 그분의 말이다. 정확히 몇 년 전 인지는 모르겠지만, 오선화 작가는 오백송이라는 팀으로 ‘니가 웃었으면 좋겠어’라는 청소년 콘서트를 매년마다 진행했다. 당시 난 정릉교회 교육목사로 있었는데, 우리 청소년부 아이들을 그 콘서트로 데려갔다. 거기서 나는 누군가의 편이 되어준다는 것에 대한 아주 놀라운 일화를 들었다.
정확하지 않은 기억을 더듬어 떠올리자면, 
“…누군가의 편이 되어준다는 것은, 그 누군가가 맞지 않은 길을 걷고 있음에도 묵묵하게 함께 걸어주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에서 친한 친구를 잃은 한 학생이 버릇처럼 등교길에 죽은 친구의 집을 향해 걸어갈 때, 묵묵히 다른 친구들이 그 학생과 함께 걸어가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듯했다. 정확히는 사무엘상 4~6장에 나오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긴 언약궤의 이야기 속의 하나님이다. 이 이야기를 짧게 요약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 분쟁 중이었고 전황은 불리했다. 당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언약궤를 전장으로 가지고 오면 이스라엘 백성의 사기가 오르고 다음 전투에서 승리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엘리의 집안을 심판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결국 그 전투는 엘리의 집안을 심판하는 전투가 되었고 언약궤는 블레셋 사람들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된다. 
이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의 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언약궤는 그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전투에서 패한다. 게다가 언약궤는 블레셋 사람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버리는 수치를 당한다. 능력의 하나님은 어디간 건가? 하나님이 더 이상 이스라엘의 편이 아니고, 그들과 함께 있지 않다면, 그의 신실성은 거짓이 된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전투에 패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그들을 떠났다고 믿는 것뿐이다. 언약궤는 블레셋의 다곤 신전에서 우상들의 목과 손을 쳐내고 쓰러뜨림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여전하다는 것을 증거한다. 오히려 다곤 신전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다. 하나님은 여전히 사무엘이라는 걸출한 사사를 통해 여전히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을 증거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가져가게 두었을까? 나는 그것 역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방식이었고, 변함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내하고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그런 하나님을 오선화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들었다. 그렇게 묵묵히 우리 편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이다. 그렇게 묵묵히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이다. 
그리고 난 그런 하나님을 지금 나의 편이 되어주는 아내를 통해 경험한다. 아내에게 매우 감사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성경암송을 죽도록 싫어하는 내게도 남아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이다. 아내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이 구절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했다. 그래서 독생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보내심은 하나님이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방식, 사랑의 방식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기에 세상과 함께 존재하기 위해 인간의 옷을 입고 우리와 함께 한 것, 그것이 내가 이해하는 성육신이다. 
위의 이야기들, 아내에게 감사한 이야기, 오선화 작가가 들려준 이야기, 사무엘 상의 하나님, 그리고 요한복음의 말씀들은 한 줄기로 내게 모여서 질문한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는가? 나는 묵묵히 누군가의 편이 되어주었는가?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가? 이다. 한동안 이 질문에 잠겨 지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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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onh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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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탄이 야훼께 아뢰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욥기 1:9, 공동번역)


하나님이 욥이 의롭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욥은 자신이 고통받는 이유에 대해서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얼핏 보면 욥기의 이야기는 사탄의 의도대로 현실의 부조리만 드러내고 끝나는 것 같다. 욥기를 떠올린 나도 여전히 내가 처한 부조리한 현실에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더라도, 안 괜찮은 현실 속에서 괜찮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이상의 것을 욥기에서도 지금의 내 삶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욥기는 사탄이 하나님에게 한 말,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겠습니까?”를 아주 멋지게 부정한다. 이 말은 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욥에게 복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말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존재한다. 하나는 사탄이 제시한 대로 복 대신 고난을 겪게 함에도 욥이 여전히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방법의 주체, 직접 손을 쓰는 존재는 하나님이 아닌 사탄이다. 욥에게 고난, 고통, 무고한 생명의 희생을 강제하여 욥은 까닭이 있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욥은 고난, 고통, 무고한 생명의 희생에도 한 결 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사탄의 주장은 부정된다. 
그러나 고난, 고통, 희생을 강제하는 방법은 결국 욥이 자신의 삶을 따져 그 입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게 했다. 하나님 역시 폭풍 속에서 욥에게 다그치듯 반문한다. 그 장면은 사탄의 말,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이 두려워하겠습니까?”- 욥이 의롭다는 말이 하나님이 복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증명 되는 듯하다.
그러나 아직 한 가지 방법이 남아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까닭 없이 욥에게 복을 주는 것-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사탄이 하나님께 한 도전에는 인과관계의 원리가 깔려 있다.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인과관계,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상에는 그 현상을 초래한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과관계라는 원리 안에서 사탄의 주장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면, 남은 방법은 그 원리 자체를 부정 혹은 대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과관계 속에서 고통의 원인을 구하는 욥에게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수많은 감히 답을 낼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을 예로 들어(38장-41장) 말씀한다. 솔직히 말해서 지나칠 정도 많다. 이미 인과관계 안에서 답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입장에서는 혼돈 그 자체다. – 하나님은 정말 혼돈을 다스린다. 그 하나님의 다스림은 그의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고,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행동하며, 만물을 그 정해진 목적으로 인도한다. 기독교 역사는 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지칭하기 위한 용어로 ‘섭리(Providence)’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  
하나님은 세상을 그의 섭리로 다스리신다. 욥은 그의 고통의 이유를 인과관계가 아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찾았어야 했다. 욥은 자신이 고통받는 이유에 대해서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질문 이상의 답을 얻었다. 욥은 인과관계의 틀에서 벗어나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2.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가서…
내가 읽은 욥의 이야기처럼, 나는 나의 안 괜찮은 현실에 대해 인과관계를 통해 바라보고자 했다. 그렇기에 언제나 원인을 찾아야 했다. 처음에는 원망의 대상을 찾아 헤매고, 결국에는 모든 원인은 내 자신임을 깨닫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 순간 나는 누군가를 또 원망했다는 깊은 죄책감과 지겹도록 반복이 되는 후회로 자존감이 바닥으로 내려가 버린다. 난 정말 끊임없이 내 자신을 인과관계의 틀 안에서 스스로를 고문해왔다. 
그러나 욥기는 내게 나의 삶의 현실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보기를 초대한다. 



3.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나의 현실을 바라보기…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로 나의 현실을 바라본다는 것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세상과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그의 말씀으로 창조하셨듯이 하나님의 섭리는 선언적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섭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주 뒤통수를 한대 후려 맞는 듯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욥의 의로움은 애초부터 증명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의로움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선언’하는 것이다. 이미 욥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온전하고 진실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 (욥기 1:8)이다. 
같은 방식으로 나의 현실을 바라보면, 나는 애초부터 내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좋은 인간, 좋은 남편, 좋은 아빠, 좋은 아들, 좋은 목회자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언이다. 나는 인과관계라는 세상의 방식에 지나치게 휘둘려서 내 자신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안 괜찮은 현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욥이 자신의 고난의 이유에 대한 답을 구할 때 답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니다. 욥이 인과관계에서 답을 구하고 있는 한 하나님은 그 답을 주시지 않는다. 같은 방식으로 난 나의 안 괜찮은 현실에 대한 원인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안 괜찮은 현실, 인간이 필연적으로 경험하는 고통에 대해 인과관계적 질문을 던짐으로 그 괴로움만 더한 것이었다. 



4. 아 내가 정말 잘못했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 (욥기 42:5-6)
나는 그리스도 인, 말씀을 사랑하고 연구하는 사람, 예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바랬다. 그런데 난 인과관계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아왔고 그 틀 안에서 나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괴롭혔음을 고백한다. 목회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지만, 인과관계의 틀 안에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평가했음을 고백한다. 그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용서를 구하게 될 기회와 그 순간에 이 마음을 잃지 않기를 기도한다. 
아내에게 그리고 아들에게도 미안하다. 나는 내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아내의 삶, 어린 아들의 삶을 희생시켰다. 늘 입버릇처럼 말한, ‘모든 것은 가장 약한 사람 기준으로’를 가정에서 더 잘 실천할 것이다. 
그리고 내 자신과 나의 창조주 하나님께도 미안하다. 나는 진정으로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린 자”이며, “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이는 자”이다.  
이런 부족한 나를 용서해주기를...



5. 그러나 여전히 안 괜찮은 현실… 나에게 동정어린 말로 위로하면서 동정어린 말로 그를 위로하면서 저마다 돈을 주고 금반지를 끼워준 사람들… 그래서 괜찮습니다. 
지난 주에 올린 글에 많은 분들이 나의 마음에 공감해주고, 나를 위로해주었다. 정말 감사하다. 내가 장문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린 것은 나름대로 바닥을 치고 올라오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여전히 안 괜찮은 현실이지만 지금 나는 생각보다 괜찮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지난 한 주간은 여러분의 답글 덕분에 더 괜찮아졌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입을 대신해서 내가 얼마나 괜찮은 인간이었는지 선언해주었다. 그 선언은 내가 스스로 뿌리가 뽑혀진 기분을 느꼈던 당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로하면서 정말 글자 그대로 저마다 돈을 주고 금반지를 끼워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환기시켰다. Macedonia UMC를 떠날 때, 내게 Macedonia UMC의 목사였던 것을 기억하게 해주는 은잔과 그 안에 돈을 담아주었던 교인들, 한국 들어가기 전까지 나를 집으로 불러 초대한 이들, 피와 땀으로 번 돈을 내 손에 쥐어 주던 이들, 사진을 좋아하는 나에게 고가의 카메라까지는 안겨준 이, 마지막까지 함께 시간을 보낸 이들, 지친 몸으로 한국으로 들어왔을 때, 물심양면으로 나를 돕기 위해 애쓰는 친구들… 이들은 진정으로 나에게 “동정어린 말로 위로하면서 동정어린 말로 그를 위로하면서 저마다 돈을 주고 금반지를 끼워준 사람들”(욥기 42:11)이다. 이들은 내 삶의 의미를 인과관계가 아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바라보도록 초대한 이들이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고마워했다. 나는 이제 그들이 얼마나 나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감사하는지 알기를 바란다. 



6. 안 괜찮은 현실… 괜찮게 만들게 해준 당신들은 내게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눈을 열어주었다. 그래서 안 괜찮지만 괜찮다.  
… 그래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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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onh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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