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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9.11.15 중전

며칠째 꿈자리가 사나웠다.
무엇인가 해야 하는 데 꿈 속에서 몸이 한없이 피곤해서 아무것도 못하는 꿈, 시험을 봐야 하는 데 시험지와 답안지가 없는 꿈, 무엇인가 답답한 꿈… 마치 답답한 나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가볍게 무시하기로 했다. 대신 지난 한 주간 내게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며 몇 가지를 떠올렸다. 그 몇 가지는 아내에 대한 감사함, 오선화 작가가 들려준 이야기, 성경 이야기 하나와 성경 구절 하나다. 



내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아내는 한결 같이 내편이 되어주었다. 어쩌면 아내는 항상 내편이었는데, 그것을 한국에 들어와서 느낀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지금 아내는 내편이다. 나는 그것에 대한 감사한다. 내 감정이 요동치고 있을 때나 우울할 때, 아내는 인내심을 가지고 내편이 되어주었다. 
아내가 내편이 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아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예전에 Union Presbyterian Seminary 어드미션 담당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사랑에 대한 정의를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했는데, 이 사랑의 정의를 아내를 통해 오랜 시간동안 아주 강하게 경험한 것이다.  
이 사랑의 경험은 매우 강력하다. 1년여 가까이 바닥을 향해가고 있던 나의 에너지의 방향을 바꿔 놓았다. 그 증거로 며칠째 이어지는 사나운 꿈자리가 나의 전반적인 감정을 지배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내에 대한 감사함을 떠올리게 하지 않았는가? 아내의 사랑은 나의 에너지를 변화시켰다. 



오선화 작가가 떠오르게 된 것은 이 글을 끄적이면서 갑자기 떠오르게 된 ‘누군가의 편이 되어 준다는 것’에 대한 그분의 말이다. 정확히 몇 년 전 인지는 모르겠지만, 오선화 작가는 오백송이라는 팀으로 ‘니가 웃었으면 좋겠어’라는 청소년 콘서트를 매년마다 진행했다. 당시 난 정릉교회 교육목사로 있었는데, 우리 청소년부 아이들을 그 콘서트로 데려갔다. 거기서 나는 누군가의 편이 되어준다는 것에 대한 아주 놀라운 일화를 들었다.
정확하지 않은 기억을 더듬어 떠올리자면, 
“…누군가의 편이 되어준다는 것은, 그 누군가가 맞지 않은 길을 걷고 있음에도 묵묵하게 함께 걸어주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에서 친한 친구를 잃은 한 학생이 버릇처럼 등교길에 죽은 친구의 집을 향해 걸어갈 때, 묵묵히 다른 친구들이 그 학생과 함께 걸어가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듯했다. 정확히는 사무엘상 4~6장에 나오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긴 언약궤의 이야기 속의 하나님이다. 이 이야기를 짧게 요약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 분쟁 중이었고 전황은 불리했다. 당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언약궤를 전장으로 가지고 오면 이스라엘 백성의 사기가 오르고 다음 전투에서 승리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엘리의 집안을 심판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결국 그 전투는 엘리의 집안을 심판하는 전투가 되었고 언약궤는 블레셋 사람들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된다. 
이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의 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언약궤는 그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전투에서 패한다. 게다가 언약궤는 블레셋 사람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버리는 수치를 당한다. 능력의 하나님은 어디간 건가? 하나님이 더 이상 이스라엘의 편이 아니고, 그들과 함께 있지 않다면, 그의 신실성은 거짓이 된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전투에 패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그들을 떠났다고 믿는 것뿐이다. 언약궤는 블레셋의 다곤 신전에서 우상들의 목과 손을 쳐내고 쓰러뜨림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여전하다는 것을 증거한다. 오히려 다곤 신전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다. 하나님은 여전히 사무엘이라는 걸출한 사사를 통해 여전히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을 증거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가져가게 두었을까? 나는 그것 역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방식이었고, 변함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내하고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그런 하나님을 오선화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들었다. 그렇게 묵묵히 우리 편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이다. 그렇게 묵묵히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이다. 
그리고 난 그런 하나님을 지금 나의 편이 되어주는 아내를 통해 경험한다. 아내에게 매우 감사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성경암송을 죽도록 싫어하는 내게도 남아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이다. 아내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이 구절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했다. 그래서 독생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보내심은 하나님이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방식, 사랑의 방식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기에 세상과 함께 존재하기 위해 인간의 옷을 입고 우리와 함께 한 것, 그것이 내가 이해하는 성육신이다. 
위의 이야기들, 아내에게 감사한 이야기, 오선화 작가가 들려준 이야기, 사무엘 상의 하나님, 그리고 요한복음의 말씀들은 한 줄기로 내게 모여서 질문한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는가? 나는 묵묵히 누군가의 편이 되어주었는가?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가? 이다. 한동안 이 질문에 잠겨 지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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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onhwe
:

1. 사탄이 야훼께 아뢰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욥기 1:9, 공동번역)


하나님이 욥이 의롭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욥은 자신이 고통받는 이유에 대해서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얼핏 보면 욥기의 이야기는 사탄의 의도대로 현실의 부조리만 드러내고 끝나는 것 같다. 욥기를 떠올린 나도 여전히 내가 처한 부조리한 현실에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더라도, 안 괜찮은 현실 속에서 괜찮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이상의 것을 욥기에서도 지금의 내 삶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욥기는 사탄이 하나님에게 한 말,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겠습니까?”를 아주 멋지게 부정한다. 이 말은 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욥에게 복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말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존재한다. 하나는 사탄이 제시한 대로 복 대신 고난을 겪게 함에도 욥이 여전히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방법의 주체, 직접 손을 쓰는 존재는 하나님이 아닌 사탄이다. 욥에게 고난, 고통, 무고한 생명의 희생을 강제하여 욥은 까닭이 있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욥은 고난, 고통, 무고한 생명의 희생에도 한 결 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사탄의 주장은 부정된다. 
그러나 고난, 고통, 희생을 강제하는 방법은 결국 욥이 자신의 삶을 따져 그 입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게 했다. 하나님 역시 폭풍 속에서 욥에게 다그치듯 반문한다. 그 장면은 사탄의 말,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이 두려워하겠습니까?”- 욥이 의롭다는 말이 하나님이 복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증명 되는 듯하다.
그러나 아직 한 가지 방법이 남아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까닭 없이 욥에게 복을 주는 것-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사탄이 하나님께 한 도전에는 인과관계의 원리가 깔려 있다.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인과관계,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상에는 그 현상을 초래한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과관계라는 원리 안에서 사탄의 주장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면, 남은 방법은 그 원리 자체를 부정 혹은 대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과관계 속에서 고통의 원인을 구하는 욥에게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수많은 감히 답을 낼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을 예로 들어(38장-41장) 말씀한다. 솔직히 말해서 지나칠 정도 많다. 이미 인과관계 안에서 답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입장에서는 혼돈 그 자체다. – 하나님은 정말 혼돈을 다스린다. 그 하나님의 다스림은 그의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고,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행동하며, 만물을 그 정해진 목적으로 인도한다. 기독교 역사는 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지칭하기 위한 용어로 ‘섭리(Providence)’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  
하나님은 세상을 그의 섭리로 다스리신다. 욥은 그의 고통의 이유를 인과관계가 아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찾았어야 했다. 욥은 자신이 고통받는 이유에 대해서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질문 이상의 답을 얻었다. 욥은 인과관계의 틀에서 벗어나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2.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가서…
내가 읽은 욥의 이야기처럼, 나는 나의 안 괜찮은 현실에 대해 인과관계를 통해 바라보고자 했다. 그렇기에 언제나 원인을 찾아야 했다. 처음에는 원망의 대상을 찾아 헤매고, 결국에는 모든 원인은 내 자신임을 깨닫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 순간 나는 누군가를 또 원망했다는 깊은 죄책감과 지겹도록 반복이 되는 후회로 자존감이 바닥으로 내려가 버린다. 난 정말 끊임없이 내 자신을 인과관계의 틀 안에서 스스로를 고문해왔다. 
그러나 욥기는 내게 나의 삶의 현실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보기를 초대한다. 



3.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나의 현실을 바라보기…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로 나의 현실을 바라본다는 것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세상과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그의 말씀으로 창조하셨듯이 하나님의 섭리는 선언적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섭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주 뒤통수를 한대 후려 맞는 듯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욥의 의로움은 애초부터 증명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의로움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선언’하는 것이다. 이미 욥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온전하고 진실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 (욥기 1:8)이다. 
같은 방식으로 나의 현실을 바라보면, 나는 애초부터 내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좋은 인간, 좋은 남편, 좋은 아빠, 좋은 아들, 좋은 목회자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언이다. 나는 인과관계라는 세상의 방식에 지나치게 휘둘려서 내 자신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안 괜찮은 현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욥이 자신의 고난의 이유에 대한 답을 구할 때 답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니다. 욥이 인과관계에서 답을 구하고 있는 한 하나님은 그 답을 주시지 않는다. 같은 방식으로 난 나의 안 괜찮은 현실에 대한 원인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안 괜찮은 현실, 인간이 필연적으로 경험하는 고통에 대해 인과관계적 질문을 던짐으로 그 괴로움만 더한 것이었다. 



4. 아 내가 정말 잘못했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 (욥기 42:5-6)
나는 그리스도 인, 말씀을 사랑하고 연구하는 사람, 예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바랬다. 그런데 난 인과관계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아왔고 그 틀 안에서 나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괴롭혔음을 고백한다. 목회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지만, 인과관계의 틀 안에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평가했음을 고백한다. 그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용서를 구하게 될 기회와 그 순간에 이 마음을 잃지 않기를 기도한다. 
아내에게 그리고 아들에게도 미안하다. 나는 내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아내의 삶, 어린 아들의 삶을 희생시켰다. 늘 입버릇처럼 말한, ‘모든 것은 가장 약한 사람 기준으로’를 가정에서 더 잘 실천할 것이다. 
그리고 내 자신과 나의 창조주 하나님께도 미안하다. 나는 진정으로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린 자”이며, “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이는 자”이다.  
이런 부족한 나를 용서해주기를...



5. 그러나 여전히 안 괜찮은 현실… 나에게 동정어린 말로 위로하면서 동정어린 말로 그를 위로하면서 저마다 돈을 주고 금반지를 끼워준 사람들… 그래서 괜찮습니다. 
지난 주에 올린 글에 많은 분들이 나의 마음에 공감해주고, 나를 위로해주었다. 정말 감사하다. 내가 장문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린 것은 나름대로 바닥을 치고 올라오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여전히 안 괜찮은 현실이지만 지금 나는 생각보다 괜찮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지난 한 주간은 여러분의 답글 덕분에 더 괜찮아졌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입을 대신해서 내가 얼마나 괜찮은 인간이었는지 선언해주었다. 그 선언은 내가 스스로 뿌리가 뽑혀진 기분을 느꼈던 당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로하면서 정말 글자 그대로 저마다 돈을 주고 금반지를 끼워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환기시켰다. Macedonia UMC를 떠날 때, 내게 Macedonia UMC의 목사였던 것을 기억하게 해주는 은잔과 그 안에 돈을 담아주었던 교인들, 한국 들어가기 전까지 나를 집으로 불러 초대한 이들, 피와 땀으로 번 돈을 내 손에 쥐어 주던 이들, 사진을 좋아하는 나에게 고가의 카메라까지는 안겨준 이, 마지막까지 함께 시간을 보낸 이들, 지친 몸으로 한국으로 들어왔을 때, 물심양면으로 나를 돕기 위해 애쓰는 친구들… 이들은 진정으로 나에게 “동정어린 말로 위로하면서 동정어린 말로 그를 위로하면서 저마다 돈을 주고 금반지를 끼워준 사람들”(욥기 42:11)이다. 이들은 내 삶의 의미를 인과관계가 아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바라보도록 초대한 이들이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고마워했다. 나는 이제 그들이 얼마나 나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감사하는지 알기를 바란다. 



6. 안 괜찮은 현실… 괜찮게 만들게 해준 당신들은 내게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눈을 열어주었다. 그래서 안 괜찮지만 괜찮다.  
… 그래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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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onhwe
:

나는 안 괜찮지만 괜찮아요...


1. 아내와 나눈 대화 – 나는 정말 괜찮지 않다.
오늘 아내와 식사를 하면서 나눈 대화의 내용은 마음 한 켠을 틀어막고 있던 둑 하나를 무너뜨렸다. 아내는 최근 6주간 ‘내면 아이 치유 소그룹’에 참여하고 있었고, 그 시간을 통해 깨달은 것들을 나누곤 했다. 아내가 깨달은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미연합감리교회(영어 회중)에서 목회를 하다가 불가피한 사정으로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나는 정말 괜찮지 않다. 한국 목회의 사정은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훨씬 빡빡한 상황이었고 다시 한국 교회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워낙 급하게 돌아와서 일단 먹고 사는 일부터 해결을 했어야 했고 지금 목회와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다. 그 덕분에 간신히 입에 풀칠은 하고 살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삶은 희망이 없어 보였다. 늘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계속해서 쫓기고 몰리는 상황은 나의 사고와 에너지 수준을 계속해서 끌어내렸고 밑바닥이 어딘지 모를 만큼 계속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정말 괜찮지 않다.
괜찮지 않은 나에게 아내가 얻은 성찰과 깨달음은 위로였다. 아내와의 나눔의 시간은 언제나 서로에 대한 감사함과 어떤 성찰과 깨달음으로 마무리가 되는데, 이번에는 내 안에서 무언인가가 건드려져 눈물샘이 자극된 것이다. 
나는 울먹이며 아내에게 “나는 지난 3년, 어쩌면 가장 행복하고 잘나갔던 미국에서의 유학생활과 목회생활을 지워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2. 가장 행복했던 시간 동시에 지워 버리고 싶은 시간 – 나는 정말 억울하다.
미국에서 3년의 시간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학교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행복하게 할 수 있었고, 행복한 공부는 좋은 결과로 나타났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미연합감리교회에서 목회하는 것으로 방향이 틀어졌는데, 이 과정 역시 너무나 자연스럽게 잘 풀어졌다. 주위 목회자들도 이렇게 쉽게 풀리는 케이스가 없었다고 한다. 현지 교회에서 목회 역시 잘 풀렸다. 언어의 장벽도 있었지만, 내가 하는 설교 때문에 교회에 안 나오던 분들도 나오고 심지어 근처 교회 교인들도 내 설교를 듣고 싶어서 예배를 두 번 드릴 정도였다. 몇 번의 장례식 집례는 지역사회에서 아시아인 한 사람이 아닌 Pastor Kim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그래, 열심히 했고, 열심히 한 만큼 인정도 받았고, 행복하게 예배하고, 말씀 전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지냈다. 
그런데 나는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그 교회의 몇몇은 내가 그 교회를 떠나게 된 원인을 그 교회에서 오랫동안 주인 노릇하던 부부 때문이라 여길 것이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 부부는 내가 직접 경험한 가장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을 뒤에 조종하고 거짓말을 퍼트리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뭐든지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다들 살아가면서 그런 사람들 경험하지 않는가? 교인들뿐만 아니라 내가 경험한 목회자들도 그러했고, 또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래서 교인들 때문에 떠난 것은 아니다.
내가 교회를 떠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는 나를 포함한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다. 그것이 그 당시에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고, 지금 일 년이 지난 이 시간, 지금의 삶이 아무리 불만족스럽고 힘들어도, 수백 번의 시뮬레이션을 돌려도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최선의 선택을 한 나의 삶은 정말 괜찮지 않다. 내가 이루고 싶은 것들을 이미 이룬 동료 목사들을 보면 축하하기 보다는 시기심부터 올라온다. 내 최선의 선택에 의심을 한다. 아내와 아들의 희생을 다소 감수하더라도 내가 원하던 것들 – 좋은 목회자, 성공한 목회자, 혹은 학자의 꿈을 이루었어야 했는가? 이미 알게 모르게 아내와 아들을 희생시킨 것만으로 마음이 괴롭고 힘든데, 그것을 또 요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도 정말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런데 왜 억울한 마음이 들까?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해봐도, 최선의 선택이 맞는데, 억울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3. 갑작스럽게 떠오른 사라져간 생명들 (욥의 희생된 가족, 종, 가축) – 의로움을 증명하기 위한 희생
하던 짓이 목사질이라, 욥기서가 떠올랐다. (내가 욥과 비슷한 처지라는 개소리를 하기 위해 떠올린 것이 아니다!)
욥기서는 여러가지로 흥미로운 책인데 그 배경부터가 맘에 든다. 이스라엘 땅이 아닌, 이방인의 땅, 우스 땅,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의 율법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거기에 욥이라는 사람이 있고 의롭다 라는 소리를 듣는다. 율법이 통하지 않고 율법을 알리 만무한 이가 의롭다? 시작부터 흥미롭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욥에 대해서 다른 신적(하나님의 아들들) 존재들 앞에서 자랑하고, 사탄도 그 자리에 있다. 사탄(고발자)은 욥의 의로움을 시험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점점 흥미롭다. 
게다가 하나님은 사탄의 제안에 따라 욥의 의로움을 시험하게 허락한다. 의로움을 증명하기 위해 욥이 시험을 당하는 것을 허락, 욥을 의롭다고 보는 하나님의 안목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사탄 주관의 시험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랑하고, 사탄은 증명하라고 하고, 하나님은 사탄의 제안대로 하고… 전형적인 하나님, 사탄, 의로운 인간의 모습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 신개념의 드라마이다. 정말 미치도록 재미있다. 거의 막장 드라마 급이다.     
하나님은 욥이 의롭다는 것을 증명했는가? 못했다. 욥은 자신이 고통받는 이유에 대해서 답을 얻었는가? 못 얻었다.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고 아무 원하는 답도 얻지 못한 채, 욥기는 ‘하나님은 혼란마저 다스리신다’라는 알쏭달쏭한 답을 남기고, 그 모호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답 앞에서 욥이 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서둘러 마무리 짓는다. 욥이 고난을 받은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 마치 블랙 코미디 같다. 
이 블랙 코미디는 내가 살아가고 있는 부조리한 현실을 드러낸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고 누군가의 생명을 희생할 것을 요구하는 현실이다. 욥기 초반부에 사탄이 제안한 욥의 의로움을 증명하기 위한 시험, 생명을 해하고 고통을 안고 살아야 하는 압제의 현실이다. 이 현실은 의롭다던 욥이 자기의 탄생을 저주까지 하게 한다. 
이 욥기가 드러내는 부조리는 오늘날 내가 처한 세상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인간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그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다. 그런데 한 인간의 삶이란 다른 여러 사람들의 삶과 엮여 있기 때문에, 아무리 주위의 사람을 배려한다고 해도 가장 가까운 가족들은 불가피한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삶이 당연한 삶이라 여긴다. 나의 어린 시절, 청소년기, 청년기때 이런 삶 – 사탄이 제안한 무엇인가 증명하기 위해 자신과 다른 생명을 희생하는 삶 - 이 당연한 것이라 받아들였다. 
어쩌면 나의 사라지지 않는 억울한 마음은 여기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나는 나를 좋은 목회자로, 성공적인 목회자로 증명하기 위해 내 자신의 삶을 깎아냈다. 내 삶을 깎아내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풀리지 않는 육체의 피로와 스트레스로 나타났고 나 때문에 이미 큰 희생을 감내하고 있는 아내와 아들에게 악영향을 미쳤다. 나는 그런 삶이 더 의미 있는 삶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믿었었다. 그러나 그 불가피한 선택, 내 자신을 증명하고자 한 선택은 아내와 아들을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갉아먹었다. 
나의 억울한 마음의 이유가 더 분명해진다. 처음에는 나의 억울함 마음이 무엇인가 좋은 선물을 받았다가 갑작스럽게 빼앗긴 아이와 같은 억울함이라 생각했다. 실상은 내가 당연하게 생각한 삶의 방식, 사탄이 제안한 무엇인가 증명하기 위해 자신과 다른 생명을 희생하는 삶에서 재미를 못 봤기 때문이다. 
욥의 의로움을 증명하기 위해 희생당한 생명들, 욥의 자녀들과 내 아내와 아들이 겹쳐 보인다. 나의 선택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내 아내와 아들을 희생하지 않기 위한 선택 - 사탄이 제안한 방식을 거부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래 정말 최선의 선택이다. 



4. 안 괜찮지만 괜찮다.
내가 최선의 선택을 했지만, 나의 현실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나는 내일 또 출근을 준비하고 하루의 일을 감당하고 모자라는 월급을 채우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이다. 여전히 나의 삶은 안 괜찮다. 그런데 또 괜찮다. 아내는 오늘이 행복하다고 말하고 도준이는 나만 보면 분위기가 밝아진다. 나 역시 미국에서 삶 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조금 덜 피곤하다. 여전히 40년간 프로그래밍 된 삶의 방식과 새롭게 시작되는 삶의 방식이 내면에서 충돌하고 있어서 힘들지만… 그래서 안 괜찮지만… 뭐 괜찮다. 더 좋아질 것이다. 



5. 다시 기회가 돌아온다면… 
나에게는 아직 목회에 대한 미련이 있다. 성경을 연구하고 말씀을 나누는 일이 행복했다. 오고 가는 길에 교인 집에 잠깐 들려 농담 따먹기도 하고 함께 기도하던 때가 즐거웠다. 다시 목회할 기회가 생길지는 모르겠다. 미국에 가기 전에도 한국교회의 목회 방식에 적응하기 힘들었고 지금은 더 적응하기 힘들 것이다. 교단 혹은 교회의 제도적 아젠다를 위한 목회는 예전보다 지금이 더 싫다. 
그래도 만에 하나 내게 다시 기회가 돌아온다면 나를 증명하기 위한 목회가 아니라 온전히 여러가지 이유로 희생당하는 생명들의 편에 설 것이다. 이 글을 쓰고 나니 마음이 정말 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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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한 남자가 자기 아내에게 어떤 어려운 부탁을 했다.
그 아내는 그 어려운 부탁을 아주 성실하게 해냈고,
그 남자는 기쁨의 겨워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 아내는 기지를 발휘해 100가지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했다.
남편 역시 이에 지지 않고 10초 내에 100가지의 소원을 모두 말하면 들어주겠다고 했다.
남편 머리 위에 앉아 있는 아내는 남편에게 바로 내 첫 번째 소원은 100가지의 소원을 여유 있게 말하는 것이고,
나머지 99가지도 이와 같다.
그렇다면, 남편은 몇 가지의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가?

보기)
1) 1
2) 100
3) 10000
4) 무시한다.
5) 개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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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잘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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