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꿈자리가 사나웠다.
다시 시작... 2023. 7. 5. 23:01 |며칠째 꿈자리가 사나웠다.
무엇인가 해야 하는 데 꿈 속에서 몸이 한없이 피곤해서 아무것도 못하는 꿈, 시험을 봐야 하는 데 시험지와 답안지가 없는 꿈, 무엇인가 답답한 꿈… 마치 답답한 나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가볍게 무시하기로 했다. 대신 지난 한 주간 내게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며 몇 가지를 떠올렸다. 그 몇 가지는 아내에 대한 감사함, 오선화 작가가 들려준 이야기, 성경 이야기 하나와 성경 구절 하나다.
내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아내는 한결 같이 내편이 되어주었다. 어쩌면 아내는 항상 내편이었는데, 그것을 한국에 들어와서 느낀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지금 아내는 내편이다. 나는 그것에 대한 감사한다. 내 감정이 요동치고 있을 때나 우울할 때, 아내는 인내심을 가지고 내편이 되어주었다.
아내가 내편이 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아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예전에 Union Presbyterian Seminary 어드미션 담당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사랑에 대한 정의를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했는데, 이 사랑의 정의를 아내를 통해 오랜 시간동안 아주 강하게 경험한 것이다.
이 사랑의 경험은 매우 강력하다. 1년여 가까이 바닥을 향해가고 있던 나의 에너지의 방향을 바꿔 놓았다. 그 증거로 며칠째 이어지는 사나운 꿈자리가 나의 전반적인 감정을 지배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내에 대한 감사함을 떠올리게 하지 않았는가? 아내의 사랑은 나의 에너지를 변화시켰다.
오선화 작가가 떠오르게 된 것은 이 글을 끄적이면서 갑자기 떠오르게 된 ‘누군가의 편이 되어 준다는 것’에 대한 그분의 말이다. 정확히 몇 년 전 인지는 모르겠지만, 오선화 작가는 오백송이라는 팀으로 ‘니가 웃었으면 좋겠어’라는 청소년 콘서트를 매년마다 진행했다. 당시 난 정릉교회 교육목사로 있었는데, 우리 청소년부 아이들을 그 콘서트로 데려갔다. 거기서 나는 누군가의 편이 되어준다는 것에 대한 아주 놀라운 일화를 들었다.
정확하지 않은 기억을 더듬어 떠올리자면,
“…누군가의 편이 되어준다는 것은, 그 누군가가 맞지 않은 길을 걷고 있음에도 묵묵하게 함께 걸어주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에서 친한 친구를 잃은 한 학생이 버릇처럼 등교길에 죽은 친구의 집을 향해 걸어갈 때, 묵묵히 다른 친구들이 그 학생과 함께 걸어가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듯했다. 정확히는 사무엘상 4~6장에 나오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긴 언약궤의 이야기 속의 하나님이다. 이 이야기를 짧게 요약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 분쟁 중이었고 전황은 불리했다. 당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언약궤를 전장으로 가지고 오면 이스라엘 백성의 사기가 오르고 다음 전투에서 승리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엘리의 집안을 심판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결국 그 전투는 엘리의 집안을 심판하는 전투가 되었고 언약궤는 블레셋 사람들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된다.
이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의 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언약궤는 그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전투에서 패한다. 게다가 언약궤는 블레셋 사람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버리는 수치를 당한다. 능력의 하나님은 어디간 건가? 하나님이 더 이상 이스라엘의 편이 아니고, 그들과 함께 있지 않다면, 그의 신실성은 거짓이 된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전투에 패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그들을 떠났다고 믿는 것뿐이다. 언약궤는 블레셋의 다곤 신전에서 우상들의 목과 손을 쳐내고 쓰러뜨림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여전하다는 것을 증거한다. 오히려 다곤 신전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다. 하나님은 여전히 사무엘이라는 걸출한 사사를 통해 여전히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을 증거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가져가게 두었을까? 나는 그것 역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방식이었고, 변함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내하고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그런 하나님을 오선화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들었다. 그렇게 묵묵히 우리 편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이다. 그렇게 묵묵히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이다.
그리고 난 그런 하나님을 지금 나의 편이 되어주는 아내를 통해 경험한다. 아내에게 매우 감사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성경암송을 죽도록 싫어하는 내게도 남아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이다. 아내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이 구절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했다. 그래서 독생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보내심은 하나님이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방식, 사랑의 방식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기에 세상과 함께 존재하기 위해 인간의 옷을 입고 우리와 함께 한 것, 그것이 내가 이해하는 성육신이다.
위의 이야기들, 아내에게 감사한 이야기, 오선화 작가가 들려준 이야기, 사무엘 상의 하나님, 그리고 요한복음의 말씀들은 한 줄기로 내게 모여서 질문한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는가? 나는 묵묵히 누군가의 편이 되어주었는가?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가? 이다. 한동안 이 질문에 잠겨 지낼 것 같다.
'다시 시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안 괜찮지만 괜찮아요 (2) (0) | 2023.07.03 |
---|---|
나는 안 괜찮지만 괜찮아요... (1) | 2023.07.01 |
양가감정 (0) | 2018.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