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탄이 야훼께 아뢰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욥기 1:9, 공동번역)


하나님이 욥이 의롭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욥은 자신이 고통받는 이유에 대해서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얼핏 보면 욥기의 이야기는 사탄의 의도대로 현실의 부조리만 드러내고 끝나는 것 같다. 욥기를 떠올린 나도 여전히 내가 처한 부조리한 현실에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더라도, 안 괜찮은 현실 속에서 괜찮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이상의 것을 욥기에서도 지금의 내 삶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욥기는 사탄이 하나님에게 한 말,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겠습니까?”를 아주 멋지게 부정한다. 이 말은 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욥에게 복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말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존재한다. 하나는 사탄이 제시한 대로 복 대신 고난을 겪게 함에도 욥이 여전히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방법의 주체, 직접 손을 쓰는 존재는 하나님이 아닌 사탄이다. 욥에게 고난, 고통, 무고한 생명의 희생을 강제하여 욥은 까닭이 있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욥은 고난, 고통, 무고한 생명의 희생에도 한 결 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사탄의 주장은 부정된다. 
그러나 고난, 고통, 희생을 강제하는 방법은 결국 욥이 자신의 삶을 따져 그 입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게 했다. 하나님 역시 폭풍 속에서 욥에게 다그치듯 반문한다. 그 장면은 사탄의 말,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이 두려워하겠습니까?”- 욥이 의롭다는 말이 하나님이 복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증명 되는 듯하다.
그러나 아직 한 가지 방법이 남아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까닭 없이 욥에게 복을 주는 것-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사탄이 하나님께 한 도전에는 인과관계의 원리가 깔려 있다.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인과관계,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상에는 그 현상을 초래한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과관계라는 원리 안에서 사탄의 주장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면, 남은 방법은 그 원리 자체를 부정 혹은 대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과관계 속에서 고통의 원인을 구하는 욥에게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수많은 감히 답을 낼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을 예로 들어(38장-41장) 말씀한다. 솔직히 말해서 지나칠 정도 많다. 이미 인과관계 안에서 답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입장에서는 혼돈 그 자체다. – 하나님은 정말 혼돈을 다스린다. 그 하나님의 다스림은 그의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고,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행동하며, 만물을 그 정해진 목적으로 인도한다. 기독교 역사는 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지칭하기 위한 용어로 ‘섭리(Providence)’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  
하나님은 세상을 그의 섭리로 다스리신다. 욥은 그의 고통의 이유를 인과관계가 아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찾았어야 했다. 욥은 자신이 고통받는 이유에 대해서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질문 이상의 답을 얻었다. 욥은 인과관계의 틀에서 벗어나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2.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가서…
내가 읽은 욥의 이야기처럼, 나는 나의 안 괜찮은 현실에 대해 인과관계를 통해 바라보고자 했다. 그렇기에 언제나 원인을 찾아야 했다. 처음에는 원망의 대상을 찾아 헤매고, 결국에는 모든 원인은 내 자신임을 깨닫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 순간 나는 누군가를 또 원망했다는 깊은 죄책감과 지겹도록 반복이 되는 후회로 자존감이 바닥으로 내려가 버린다. 난 정말 끊임없이 내 자신을 인과관계의 틀 안에서 스스로를 고문해왔다. 
그러나 욥기는 내게 나의 삶의 현실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보기를 초대한다. 



3.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나의 현실을 바라보기…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로 나의 현실을 바라본다는 것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세상과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그의 말씀으로 창조하셨듯이 하나님의 섭리는 선언적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섭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주 뒤통수를 한대 후려 맞는 듯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욥의 의로움은 애초부터 증명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의로움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선언’하는 것이다. 이미 욥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온전하고 진실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 (욥기 1:8)이다. 
같은 방식으로 나의 현실을 바라보면, 나는 애초부터 내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좋은 인간, 좋은 남편, 좋은 아빠, 좋은 아들, 좋은 목회자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언이다. 나는 인과관계라는 세상의 방식에 지나치게 휘둘려서 내 자신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안 괜찮은 현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욥이 자신의 고난의 이유에 대한 답을 구할 때 답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니다. 욥이 인과관계에서 답을 구하고 있는 한 하나님은 그 답을 주시지 않는다. 같은 방식으로 난 나의 안 괜찮은 현실에 대한 원인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안 괜찮은 현실, 인간이 필연적으로 경험하는 고통에 대해 인과관계적 질문을 던짐으로 그 괴로움만 더한 것이었다. 



4. 아 내가 정말 잘못했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 (욥기 42:5-6)
나는 그리스도 인, 말씀을 사랑하고 연구하는 사람, 예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바랬다. 그런데 난 인과관계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아왔고 그 틀 안에서 나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괴롭혔음을 고백한다. 목회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지만, 인과관계의 틀 안에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평가했음을 고백한다. 그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용서를 구하게 될 기회와 그 순간에 이 마음을 잃지 않기를 기도한다. 
아내에게 그리고 아들에게도 미안하다. 나는 내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아내의 삶, 어린 아들의 삶을 희생시켰다. 늘 입버릇처럼 말한, ‘모든 것은 가장 약한 사람 기준으로’를 가정에서 더 잘 실천할 것이다. 
그리고 내 자신과 나의 창조주 하나님께도 미안하다. 나는 진정으로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린 자”이며, “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이는 자”이다.  
이런 부족한 나를 용서해주기를...



5. 그러나 여전히 안 괜찮은 현실… 나에게 동정어린 말로 위로하면서 동정어린 말로 그를 위로하면서 저마다 돈을 주고 금반지를 끼워준 사람들… 그래서 괜찮습니다. 
지난 주에 올린 글에 많은 분들이 나의 마음에 공감해주고, 나를 위로해주었다. 정말 감사하다. 내가 장문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린 것은 나름대로 바닥을 치고 올라오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여전히 안 괜찮은 현실이지만 지금 나는 생각보다 괜찮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지난 한 주간은 여러분의 답글 덕분에 더 괜찮아졌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입을 대신해서 내가 얼마나 괜찮은 인간이었는지 선언해주었다. 그 선언은 내가 스스로 뿌리가 뽑혀진 기분을 느꼈던 당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로하면서 정말 글자 그대로 저마다 돈을 주고 금반지를 끼워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환기시켰다. Macedonia UMC를 떠날 때, 내게 Macedonia UMC의 목사였던 것을 기억하게 해주는 은잔과 그 안에 돈을 담아주었던 교인들, 한국 들어가기 전까지 나를 집으로 불러 초대한 이들, 피와 땀으로 번 돈을 내 손에 쥐어 주던 이들, 사진을 좋아하는 나에게 고가의 카메라까지는 안겨준 이, 마지막까지 함께 시간을 보낸 이들, 지친 몸으로 한국으로 들어왔을 때, 물심양면으로 나를 돕기 위해 애쓰는 친구들… 이들은 진정으로 나에게 “동정어린 말로 위로하면서 동정어린 말로 그를 위로하면서 저마다 돈을 주고 금반지를 끼워준 사람들”(욥기 42:11)이다. 이들은 내 삶의 의미를 인과관계가 아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바라보도록 초대한 이들이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고마워했다. 나는 이제 그들이 얼마나 나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감사하는지 알기를 바란다. 



6. 안 괜찮은 현실… 괜찮게 만들게 해준 당신들은 내게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눈을 열어주었다. 그래서 안 괜찮지만 괜찮다.  
… 그래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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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onh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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